기다려라, 터질 것이다

분류없음 2011.08.25 09:01

        LG에서 넥센으로 이적한 박병호는 입단 때부터 거포 유망주로 주목받았지만, 한번도 터진 적이 없는
          휴화산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넥센 이적 후 박병호는 자신감 있는 스윙으로 LG 시절과는 전혀 달라
          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 그의 나이 스물 여섯. 한창 야구선수가 기량이 만개할 시점이다. (사진
          =넥센히어로즈)

알렉스 고든과 카메론 메이빈. 한때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망주였던 선수들이다. 고든은 2005년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로 캔자스시티 로얄스에, 메이빈은 같은 해 1라운드 10순위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지명을 받았다. 둘 다 나란히 입단 첫 해부터 마이너리그를 초토화했다. 고든은 더블 A에서 타율 .325에 29홈런 101타점을, 메이빈은 싱글 A에서 .304에 27개의 도루로 펄펄 날았다. 지역 언론과 팬들이 두 선수의 빅리그 데뷔를 손꼽아 기다린 것도 당연한 일. 그리고 2007년, 모두가 고대한 그 날이 왔다. 하지만. 

기대했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든은 2007년 타율 .247에 15홈런을 기록했다. 신인치고 아주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이듬해 16홈런을 친 고든은 이후 계속 내리막을 타기 시작해 2009년에는 타율 .232에 6홈런, 지난해는 타율 .215로 끝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메이빈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 2007년 24경기에서 .143을 기록하는데 그친 그는, 플로리다로 트레이드된 다음 시즌 내내 더블 A에 머물렀다. 2009년 54경기에서 .250, 작년 82경기 타율 .234가 메이빈이 빅리그에서 거둔 성적. 급기야 시즌 뒤에는 또 다시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트레이드되기에 이른다. 

고든과 메이빈의 부진은 드래프트 동기들의 눈부신 성공과 대비되어 더 초라하게 보였다.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 2005년 드래프트에서 상위 지명된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스틴 업튼, 라이언 짐머맨, 라이언 브론, 리키 로메로, 마이크 펠프리, 앤드류 매커친, 자코비 엘스버리, 맷 가르자, 클레이 벅홀츠. 이들 대부분은 -심지어 고든-메이빈보다 낮은 순위에서 지명된 선수들조차-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빠르게 스타플레이어로 성장했다. 반면 고든과 메이빈은 숱한 기회에도 불구하고 빅리그에서는 잣죽만 쒔다. 한때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두 유망주는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기회를 주고 기다려도 터지지 않던 두 선수가, 마침내 올 시즌 들어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24일 현재까지 고든은 123경기에 출전해 타율 .297에 16홈런 13도루 67타점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고 있다. OPS는 .856로 팀내 타자 중에 1위. 메이빈도 현재까지 110경기에서 타율 .277에 8홈런 32도루로 공수에서 샌디에이고에 없어선 안 될 선수가 된지 오래다. 고든의 나이 올해로 27세, 메이빈이 24세로 한창 전성기에 접어들 나이. 비록 사람들의 기대보다 한참 늦긴 했지만, 끊임없이 참고 기다린 끝에 결국엔 ‘터진’ 것이다. 

두 선수 외에도 올해 메이저리그에는 데뷔 12년만에 올스타가 된 라이언 보겔송(올해 전까지 10승 22패/올해 10승 3패), 2004년 데뷔해 8년만에 빅리그 중심타자로 자리잡은 마이크 카프(42경기 타율 .329 6홈런 26타점) 등 ‘대기만성’의 사례들이 즐비하다. 만년 저니맨에서 서른살이 된 지난해부터 최고의 홈런타자로 거듭난 호세 바티스타는 그 중 가장 극적인 사례일 것이다. 

다른 종목에서는 이런 예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스포츠산업 전문가인 동명대 전용배 교수는 축구와 야구의 차이를 들어 “축구는 천재들의 운동이지만, 야구는 천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스포츠”라고 말한다. “축구의 선수로서 운동수행 능력은 보통 22세 이전에 결정된다. 후보선수가 나이 들어 뒤늦게 스타플레이어가 된 사례를 축구나 농구 같은 종목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야구에선 바티스타나 KIA 김상현처럼 서른 살이 되어 뒤늦게 ‘포텐이 터진’ 선수가 종종 나온다. 전 교수는 “야구는 천재가 아니라도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한 운동”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론 기본적인 재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천재가 아니라도 노력하면 늦은 나이에도 스타급으로 성장할 수 있다. 재능이 약간 부족하더라도 기본적인 정신적 자세만 갖춰지면 노력을 통해 따라잡을 수 있다. 설령 군대 다녀온 뒤라도 늦지 않은 게 야구다.” 

그래서 필요한 게 ‘기다림’이다. 원래 야구는 기다리는 종목이다. 모든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긴 시즌을 치르는 운동에서 기다림의 미덕은 필수다. 수비수들은 자신에게 타구가 오기를 기다리고, 타자는 노리는 공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기다린다. 선수들은 모두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힘든 훈련과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내고 자신에게 기회가 오길 기다린다. 선수 뿐만 아니라 감독도 선수들을 믿고 기다린다. 구단도, 심지어 팬들도 부단한 참을성과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게 야구다. 기다릴 줄 모르고 참아내지 못하는 선수나 팀은,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과거의 프로야구는 기다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년 겨울마다 입단한지 2~3년도 되지 않은 선수가 무더기로 방출됐다. 조금만 더 기회를 줬다면 팀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선수 상당수가 일찌감치 야구 인생을 접었다. 또 선수들 스스로도 인내심이 부족했다. 아무리 해도 1군에 올라갈 희망이 보이지 않거나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으면 자포자기해서 자기관리를 엉망으로 하기 일쑤였다. 기껏 1군에서 불러줘도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올라갔다가 평판만 깎아 먹은 채 2군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한번 2군 선수는 평생 2군 선수’라는 말이 나오게 된 원인이다. 

하지만 선수 육성 파트가 발전하고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간의 격차가 커진 최근에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프로 입단과 동시에 야구판을 평정하는 괴물신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1라운더로 화려하게 입단한 선수가 1군에서 패전처리로 뛰는 게 요즘 프로야구 수준이다. 각 팀 스카우트들은 하나같이 “입단 2~3년 이후를 보고 선수를 뽑는다”고 입을 모은다. 프로야구에서 최근 3년간 신인왕 수상자는 모두 ‘중고신인’이었다. 그 중 최형우와 양의지는 군대에 다녀온 뒤에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제는 선수 인생도 야구 경기나 정규시즌만큼이나 ‘길게 보는 안목’이 필요한, 장기 레이스가 되어 가고 있다. 초반에 승부를 보지 못해도, 5회 이후에도, 시즌 중반에도, 얼마든지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결국은 ‘기다림’이다.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는 선수들에게 “목표가 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당장 프로 1군에 진입하는 것”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한 구단 스카우트는 “선수들이 길게 볼 줄 알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신인이 바로 프로에서 성공하기 힘든 요즘 추세에서, 너무 빨리 성공하려고 하다보면 좌절감만 맛볼 수 있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까 스스로가 조급해져서 무리를 하거나, 또는 훈련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포기해 버릴 수 있다는 거다. 어차피 야구선수의 전성기는 20대 후반부터다. 조금 느리고 오래 걸리더라도, 선수들이 착실하게 훈련하고 실력을 쌓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25일 오후 프로야구 2012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다. 높은 순위에서 화려하게 주목을 받으며 지명되는 선수도 있을 테고, 낮은 라운드에서 초라하게 시작하는 선수도 있을 거다. 입단 첫해 1군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2군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선수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우리가 10년 뒤에도 계속 프로에서 모습을 보게 될 선수가 누구일지는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 주인공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성공적으로 이겨낸 선수일 게다. 그리고 기다림의 의미를 깨우친 선수라면 마지막에 웃을 자격이 있다. 야구에서나, 인생에서나. 보다 많은 선수가 그렇게 되길 바란다.


제공 : 프로야구단 운영 시뮬레이션 게임 프로야구 매니저 (bm.game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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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