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가 다니엘 리오스를 방출했다는 소식이 한국 야구팬들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방출 사유가 2승 7패에 그친 부진한 성적 때문이라면 충격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패닉 상태에 빠진 이유는 리오스의 방출 사유가 다름아닌 도핑테스트 양성반응, 다시말해 금지약물 양성 반응 때문이라는 점이다. 한국을 거쳐간 외국인 선수 가운데 가장 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선수, 지난해 22승을 따내며 리그 MVP를 수상한 리오스가 아닌가.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든 경이롭고 놀라운 것들이 실은 약물에 의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팬들에게 마치 오래된 연인의 불륜을 상상하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기 충분하다. 그나마 국내 팬들로서는 리오스의 약물복용이 일본에 건너가서 시작된 것이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리오스의 도핑 양성반응은 국내 프로야구에도 만만찮은 파급효과를 몰고올 것이 분명하다. 사실 올해 초 미국에서 '미첼 리포트 Mitchell Report'가 메이저리그를 뒤흔들 때만 해도 국내 야구계는 태평양 건너 불구경 하듯 남의 일로 생각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동해 건너'에서 발발한 리오스 사태는 이제 약물 문제가 더이상 한국야구와 무관한 사안이 아님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한다. 바로 몇달 전까지 국내에서 활약하던 스타 플레이어가 연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에도 과거처럼 쉬쉬하며 대충 넘어가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프로야구는 리그 전체가 약물과 관련해 의혹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야구가 한 단계 더 올라서기 위해서는 약물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후배사랑, 약물사랑
먼저 이런 질문을 해보자. 한국프로야구에도 약물복용 선수가 존재하는가? 답은 슬프게도 '그렇다'이다. 이미 몇몇 선수들이 국제대회 출전을 앞두고 도핑테스트에서 양성 반응을 보여 엔트리에서 제외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선수들은 마치 음주측정을 거부하는 음주운전자처럼 아예 도핑 자체를 거부하는 식으로 대응하면서 야구계 약물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그 가운데 S구단 모 선수의 경우는 국내에서 약물복용에 대한 인식이 어떤 수준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이 선수는 2002년 여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과정에서 도핑테스트를 받았는데, 여기서 정상치를 넘는 테스토스테론 양성반응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때 이 선수의 변명과 여기에 대한 언론과 야구계와 팬들의 반응이 가관이다.
이 선수는 말하기를 "후배에게 대표 자리를 양보해주기 위해 소변에 약물을 섞었다"고 했다. 마치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는 아니다"라고 변명하는 어떤 고위층 인사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언론에서는 이 말도 안되는 변명을 그대로 기사화했을뿐, 여기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인 '검증'도 하지 않았다. KBO 역시도 해당 선수에 대해 당시로서는 이렇다할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나마 제정신인 일부 팬들이 비판을 가하자 그때서야 이 선수는 약물복용을 시인했고, 해당 팀 선수단에서 200만원의 가벼운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그해 이 선수는 타율 .281에 18홈런 86타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고 이후 2003년에는 21홈런, 2004년에는 24개의 홈런을 쳐냈다. 이 선수의 소속팀은 도핑 문제가 터진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2002년 당시는 메이저리그조차도 약물 문제를 지금처럼 강력하게 다루지 않던 시절이니만큼 지금의 관점으로 지나치게 가혹하게 평가하는 '발생론적 오류'를 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당시 국내야구가 팬들뿐만 아니라 선수부터 언론까지 약물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무'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약물이 잘못이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후배사랑' 운운하는 말장난성 변명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리그 차원에서도 강력한 제재가 있었을 것이며, 팬들과 언론의 격렬한 비판 공세가 연일 계속되었을 게다.
하지만 해당 선수도, KBO도, 언론도, 다른 선수들도, 그리고 팬들도 당시에는 약물복용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렇기에 12년 통산 113개 홈런인 선수가 3년동안 63개의 홈런을 쳐낸 2002~2004년에 대해 "그때 우리팀 라인업이 엄청났다. 워낙 좋은 타자들이 많아 반사 이익을 누린 것 같다. 타선에 강타자들이 많으면 도움을 많이 받는다."라고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이 대답에 대해 인터뷰한 기자는 별다른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 사례들은 이전까지 한국야구에 약물복용에 대한 인식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약물에 대해 지금처럼 중죄로 여기는 분위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설령 발생하더라도 크게 문제삼지 않고 대충 덮어두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야구의 분위기였다. 약물이 만연하기 더없이 이상적인 환경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약물에 취(약)한 프로야구?
그렇다면 한국야구에 본격적으로 약물이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많은 이들이 1998년 외국인 선수 제도 시행을 지목한다. 약물사용이 일반화된 마이너리그 출신들이 프로야구에 대거 진출하면서 국내 선수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약물이 퍼진 경로를 보면 대개 팀내 스타급 선수들이 약물을 사용해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게 먼저고, 이에 자극받은 동료들이 뒤따라서 같은 약물을 복용하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된다. 한 구단의 고참 선수는 90년대 말 같은 팀에서 뛰었던 외국인 선수를 회상하며 "덕아웃에서 무슨 약인가를 꺼내어 먹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고 했는데, 그 약이 삐콤씨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연히 보통 선수들이 (별다른 죄의식 없이) 그게 과연 무슨 약인지를 궁금하게 여겼을 것이고, 외국인 동료의 '강추'와 판매자 '소개'를 받아 구매하는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실제 1999년 프로야구에서 리그 전체 홈런 갯수는 1274개로 전해 889개보다 엄청나게 늘어났다. 사실 1998년의 889개조차도 이전 리그 홈런수가 대부분 600~700개 수준에 머물렀음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다. 단순히 계란과 닭가슴살만으로 홈런이 늘어났다고 믿기에는 지나치게 큰 증가율이다. 외국인 선수 유입이 곧 약물 유입과 동의어라고 의심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또 굴러온 돌 외국인 선수로 인해 팀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선수들이나 기량이 쇠락한 노장 선수들에게는 약물이 마지막 탈출구이자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홈런이 곧 연봉을 보장해주는 상황에서 FA 대상 선수들이 받은 유혹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한마디로 90년대말 한국 프로야구에는 약물이 들어오기 딱 좋은 상황뿐만 아니라 약물이 널리 인간을 해롭게 하기에도 더없이 이상적인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세끼 밥과 야식만 먹고 뛰는 선수는 바보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마구마구를 잘하는 플레이어도 기본 세트덱에 아이템 없이 했다가는 아이템으로 칠갑한 아마C에게도 밀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허리가 부러져라 훈련해도 이것저것 과자 줏어먹듯 복용하는 선수를 이길 수 없다면, 최후의 선택은 한 가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이 잘못된 선택이 단순히 선수 개개인의 도덕성 부재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의 변화와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생긴 결과라는 점이다. 프로야구는 약물이라는 문제에 완벽하게 무방비상태인 가운데 외국인 선수와 FA라는 제도의 문을 열어버렸다. 어떤 면에서 이 시기 잘못된 길로 접어든 선수들은 약물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나 개념이 없는 가운데 환경의 영향을 받은 피해자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마치 초딩때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포르노를 보고 평생 왜곡된 성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여기에 한국이라는 나라 특유의 풍토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이야 처방전 없이는 어떤 약도 구입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조금만 아프면 아무 약이나 마구 털어넣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고, 또 각종 영양제나 회복제를 복용하는 일도 일상적으로 행해지곤 했다. 약이란 것이 정말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많이 복용하면 좋다는 잘못된 관념이 퍼져있었다는 이야기다. 과거 야구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진통제를 먹고 내지는 대포주사를 맞고 뛰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약의 힘을 빌어 플레이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의미라고 할 수도 있다. 또 여기에 각종 보약과 한약을 수시로 지어 먹는 -술자리를 피하는 핑계 중 하나가 '한약 먹는다'일 정도로- 한국 특유의 문화도 약물복용이 퍼지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 왔다. 실제 의사들의 견해에 따르면 일부 한약에 들어가는 성분 가운데는 국제 스포츠 기구가 금지약물로 지정한 것과 동일한 성분이 검출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약을 통해 먹건 다른 방식을 통해 먹건 같은 성분이라면, 굳이 약물이 죄로 여겨질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한국의 독특한 환경이 프로야구에 약물이 퍼지는데 기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약물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늦었지만 프로야구 역시 지금부터라도 약물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여기에 대한 최대한의 예방과 징계 조처를 마련해서 약물복용을 근절할 필요가 있다. 일부에서는 과거의 약물 사례까지 낱낱이 밝혀내자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미국의 브라이언 맥나미처럼 '양심선언'을 하는 인사가 나오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실제 내부자 고발이 이뤄지더라도 몇몇 선수들에게만 철퇴가 가해지는 선에서 상황이 덮어질 것이기 때문에 큰 실효성도 없는게 사실이다. 물론 약물 거래 영수증처럼 증거가 발견될 경우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걸 갖고 야구계의 모든 약물 문제가 뿌리뽑힌 것처럼 떠들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약물 문제는 '운나쁘게 들통난' 일부 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간 이 문제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방관해온 야구계 전체가 책임을 통감해야 할 일이다. KBO는 그간 비슷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프로야구가 끝장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약물에 대한 철저한 대응을 회피해 왔다. 또한 성적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구단들과 자신들의 안위만 안중에 있는 선수협, 그리고 야구계의 온갖 문제들을 알면서도 쉬쉬하는 언론 역시 약물 문제의 주범이자 공범이다. 만일 이들이 리오스나 다른 선수를 하나 골라잡아 미국의 배리 본즈처럼 희생제물로 만들려고 시도한다면, 이는 한국야구의 미래에 최악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배리 본즈를 매장하고 의회 청문회로 난리 법석을 떨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약물 문제는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거의 모든 선수가 약물 복용 혐의자로 의심받는 결과만을 낳았을 뿐이다.
우선 KBO는 현재의 부실하기 짝이 없는 도핑테스트 방식부터 전면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현재 KBO에서는 매년 구단별로 세 명의 선수를 선정해서 총 24명에 대해서만 테스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이다. 하다못해 도축용 소도 전수조사하는 나라가 있는 마당에 몇백명 되는 선수들을 전부 테스트하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다. 모든 등록선수를 조사하기가 힘들다면 적어도 1군 엔트리에 포함되는 숫자의 선수들에 대해서만이라도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할 때만 팬들도 프로야구의 깨끗함과 정정당당함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며, 자신들의 영웅을 아무런 의심 없이 연호할 수 있을 게다.
또한 KBO와 각 구단, 선수협 등은 과거의 프로야구에서 약물 복용 실태에 대해 팬들에게 진솔하게 해명하고, 이런 문제에 대한 대응이 허술했음을 인정하고 사과를 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관련 책임자에 대한 인적 쇄신까지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메이저리그의 경우 약물 문제에 대해 버드 셀릭 커미셔너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는 있지만, 그가 선수들의 약물복용을 부추긴 '배후세력'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책임을 지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떵떵대며 몇몇 선수들을 쥐잡듯 닦달하는 광경을 보며 메이저리그에서 약물문제가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 뿐일까. KBO와 선수협 역시 약물 문제에 대해 그간 방관하고 은폐해온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또한 KBO의 경우 외국인 선수 등 각종 제도 시행에 있어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책임이 크다. 약물 문제에 대한 대승적이고 결자해지하는 자세를 야구계에 요구하고 싶다. 언제나 문제를 알면서도 구단이나 KBO의 압력에 굴하곤 하는 언론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끝으로 팬들에게도 이 문제가 일부 선수나 구단의 범죄가 아닌 야구계 전체의 문제임을 인식하도록 주문하고 싶다. 많은 이들이 리오스가 뛰던 두산 구단이나 약물복용이 의심되는 몇몇 선수들을 놓고 마녀사냥식 비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행동은 나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나 구단의 약물복용이 드러났을 때 큰 망신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그 매너좋고 야구에 대한 사랑이 넘치던 리오스가 약물을 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던가? 한국처럼 선수들 간에 네트워크가 긴밀하고 시장이 좁은 리그에서는 어떤 문제가 일개 구단이나 선수 차원에서만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과거 병역비리 사태를 보라). 약물복용이 현실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모든 구단과 모든 선수가 동일한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나 구단이 약물과 관련되어 드러난 것이 없다고 해서 지나치게 찬양하거나, 반대로 심증만으로 일부 구단과 선수가 약물의 도움을 받았다고 깎아내리는 것은 실상은 한국야구 전체를 깎아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특정 선수의 능력이나 모든 기록이 전부 100% 약물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 역시도 합리적인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야구팬들의 충격과 상심이 어느 때보다 크겠지만, 이성적이고 현명한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 글은 미디어다음 해외야구에 기고한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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