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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의 60주년을 맞이해서 뭔가를 써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다가, 요즘 다른 일로 정신이 없어서 예전에 쓴 글을 리바이벌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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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대표하는 프로스포츠의 대명사인 메이저리그. 메이저리그 드림에 이끌려서 중남미 선수들의 진출과 박찬호, 노모 히데오를 시작으로 한국, 일본, 타이완 등의 선수들이 하나 둘씩 메이저리그에 편입되면서 메이저리그는 미국의 국민적인 스포츠에서 국경과 민족, 인종을 넘어서 전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지금은 알룩달룩한 각종 색깔의 인간들이 활약하고 있는 메이저리그이지만, 50여년 전에는 건포도없는 백설기처럼 오로지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다.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브룩클린 다저스에 입단한 것을 계기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물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재키 로빈슨 이전에는 흑인들은 야구를 하지 않은 것일까?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편입학하기 전에도 많은 유색인종들은 니그로리그에서 그들만의 야구를 하였다. 그리고, 흔히들 말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유색인종들이 소탕되기 전에는 백인들과 함께 야구를 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왜 니그로리그나 흑인야구 등은 우리들에게 생소한 것일까? 그 대답은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들을 많이 하고 있듯이 야구의 역사도 승리자인 백인들(메이저리그) 중심으로 기록되었고, 또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니그로리그 이전의 흑인야구

1884년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라고 말해지고 있는 플리트 워커가 톨레도 블루 스타킹스(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서 활동하기 전에도 버드 파울러가 1872년 펜실베니아주의 백인 세미프로팀에서 활약한 기록이 있다 -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는 워커가 아닌 1879년 내셔널리그의 프로비던스 그레이스에서 1경기에 출전한 윌리암스 에드워드 화이트라는 주장도 있다. 어쨋든 상당수의 흑인선수들이 내셔널리그가 아닌 지역팀이나 세미프로팀에서 백인들과 함께 야구를 했지만, 내셔널리그가 창립되고 야구가 하나의 오락 - 보는 스포츠로서 백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 흑인 선수들에게는 오히려 재앙이 되었다. 별로 야구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던 시기에는 어딘가에서 흑인 선수가 백인들과 함께 야구를 한다고 해서 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야구가 백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면서 인종차별의 불씨가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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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야구팀이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7년 10월 브룩클린 유닉스와 필라델피아 엑셀시오르가 컬러드클럽 챔피언십을 가져서 37:24로 브룩클린 유닉스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필라델피아의 흑인 단체의 지원을 받은 필라델피아 피티언즈가 창단되어서 펜실베니아 스테이트 어소시에이션에 가입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흑인 야구팀들은 12월에 최초의 흑인야구리그인 내셔널 어소시에이션 어브 베이스볼 플레이어스(NABBP)를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흑인들이 언제부터 야구를 했을까? 진실은 저 너머에서도 찾기 어렵겠지만, 1867년 이미 컬러드클럽 챔피언십이 열렸고, NABBP를 조직할 정도로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19세기 중반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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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이지만 흑인선수들이 메이저리그나 세미 프로팀에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에 인종차별주의자로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되는 당시의 슈퍼스타인 킵 앤슨 등 남부출신 선수들을 중심으로 노예들과는 함께 경기를 할 수 없다면서 백인야구에서 흑인들의 퇴출을 요구하였다. 게다가, 흑인을 기용할 경우에 주요한 수입원인 관중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백인들의 항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흑인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배제된 것은 백인 선수들의 요청이 아닌 돈 때문이었다. 노예 해방이라는 거창한 슬로건 아래에 치뤄진 남북전쟁도 사실은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논리였듯이 당시 매경기를 보러올 수 있는 자본을 가지지 못한 흑인들은 구단의 오너들로서는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자신들의 절대적인 손님인 백인들의 심기를 구태여 건들 필요가 없었기에, 백인선수들이 싫어한다는 핑계로 흑인들을 메이저리그에서 추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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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배제된 흑인들은 야구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팀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1885년에 최초의 흑인 프로팀이라고 할 수 있는 쿠반 자이언츠가 창단하였다. 쿠반 자이언츠는 백인 프로팀들에게 승리를 거둘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자랑했지만, 메이저리그는 더욱 더 문을 단단히 봉쇄할 뿐이었다. 열등한 흑인들에게 백인들이 패배한다는 것은 수치로 받아들여졌기에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1884년 플리트 워커를 끝으로 흑인들은 메이저리그에서는 추방되었지만, 재정적으로 열악한 지방의 소규모 마이너리그 팀 중에서는 흑인선수들이 활약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이어서 마이너리그도 제대로 된 체제를 갖추면서 흑인과 백인들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니그로리그가 성립된 이후에도 그렇지만, 당시 흑인 선수들은 언젠가는 메이저리그가 자신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교묘한 편법으로 흑인선수들의 영입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1901년 볼티모어 오리올스(현 뉴욕 양아치들)의 감독인 존 맥그로는 흑인선수인 찰리 그랜트를 인디언이라고 속여서 영입을 추진하였지만, 발각되어서 무산되기도 하였다. 기대와는 달리 자신들을 분리 배제하는 구도가 확고히 되면서, 메이저리그에 대항한 흑인 프로팀들인 쿠반 엑스 자이언츠, 필라델피아 자이언츠, 시카고 레란드 자이언츠 등과 같은 강팀이 출현할 수 있었다.

니그로리그로 대동단결

니그로리그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브 포스터가 1911년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를 창단한 후, 연전 연승을 거두면서 흑인 야구팀도 독자 생존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전까지 흑인 야구팀들에 의해서 흑인리그가 결성된 적이 있었지만, 열악한 재정상황 등으로 1시즌은 커녕 1주일만에 사라지거나 심한 경우에는 하루만에 해체되기도 하였다. 흑인 야구팀 자체도 하루살이처럼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가, 한순간에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셔널리그에 대항한 아메리칸리그가 살아남아서 양대리그가 되었듯이 흑인야구도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리그를 통해서 제3의 길을 모색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안정적인 경기수의 확보를 통해서 흥행몰이를 할 수 있는 제대로된 조직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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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루브 포스터는 흑인야구의 조직화를 위해서 새로운 리그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동부와 중서부로 나눈 양대리그를 조직하려고 했지만, 동부지역 팀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물거품이 되었다. 한번의 실패 속에서도 루브 포스터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도해서 1920년 중서부팀들을 중심으로 니그로 내셔널리그(NNL)을 창설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직의 안정화와 체계화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루브 포스터의 활약 등으로 NNL은 무사히 1시즌을 마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전술과 빠르고 거친 야구에 흑인들뿐만이 아니라 백인들도 관심을 가지면서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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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NL이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가던 1923년에는 동부지역의 팀들을 중심으로 이스턴 컬러드리그(ECL)이 창설되면서 니그로리그도 양대리그가 성립하였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양대리그가 평화협정을 체결한 것처럼 상호간의 선수 스카우트 금지 등의 협정을 맺지 못하고, 서로간의 제로섬 경쟁을 펼친 것은 옥에 티였다. 재정적으로 넉넉한 상태였던 동부지구(ECL)와의 무한 경쟁은 선혈이 낭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쨋든 양대리그의 성립으로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가 개최될 수 있었다. 흥행을 극대화하기 위한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였지만, 흥행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흥행에 실패한 주요한 원인은 니그로리그의 주고객들인 흑인들이 10차전(후에는 6차전제에 이어서 5승제로 바뀌었지만)까지 치뤄지는 시리즈에 매경기마다 야구장을 찾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양대리그의 소모적인 무한경쟁은 끝내 파국으로 치달아서 1927년을 끝으로 ECL이 해체되고, 1929년 아메리칸 니그로리그(ANL)이 탄생하지만, 1년만에 문을 닫으면서 NNL만이 흑인야구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게 되었다. 1930년 흑인야구의 대부로서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루브 포스터가 한많은 생을 마감하면서 NNL도 1931년을 끝으로 그 막을 내렸다. 한때 양대리그가 성립하면서 발전하던 니그로리그가 순식간에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제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대사건도 있었지만, 각 구단의 이기심도 한 요인이었다.

니그로리그의 구단들의 재정상황은 구단에 따라서 제각각이었다. 재정적으로 풍족한 몇 몇 팀에 팬들을 야구장으로 유혹할 수 있는 슈퍼스타들이 집중되면서 구단간의 실력차와 재정 상태는 더욱 더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루브 포스터 등은 이런 구단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리그 협회의 몫으로 경제적 지원 등으로 해결하였지만,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부지역의 팀들로서는 리그전보다 같은 지역의 팀들과 개별경기를 가지는 편이 흥행상 유리하였기에, 리그전을 기피하고 개별경기를 더 많이 가지려고 하였다. 리그가 개별구단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었다.

니그로리그의 재건

NNL의 붕괴로 새로운 흑인야구의 조직화가 필요하였지만, 대공황으로 여의치 않았다. 대공황이라는 태풍이 지나간 1932년 다시 흑인야구는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스트 웨스트리그(EWL)과 니그로 사우던리그(NSL)이 창설되었지만, 둘다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1933년 피츠버그 크로포드스의 구단주인 가스 그린리에 의해서 니그로 내셔널리그가 재탄생되었다. 니그로 내셔널리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이후로 기존의 백인자본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흑인자본이 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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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부활한 니그로 내셔널리그 역시 경제적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린리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단 한경기로 180도 역전되었다. 그린리는 [이스트 웨스트 클래식]이라는 올스타 게임을 제안하였고, 제1회 경기는 2만여명의 관중들이 보는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매년 시카고의 코미스키파크에서 열린 니그로리그 올스타전은 나날이 성장을 거듭하여 흑인들만이 아니라 백인들도 관심을 가져서, 1940년대에는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을 능가하는 5만명 이상의 관중이 동원되었다. 니그로 올스타전을 통해서 그전까지 메이저리그의 틈새 시장 정도로 인식되던 니그로리그의 급성장은 비지니스적으로 흑인 시장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브랜치 리키나 빌 벅 등은 니그로리그의 성장은 잠재적으로 메이저리그의 (흥행상) 퇴보를 가져올 것으로 내다보았고, 또한 돈을 가지게 된 흑인시장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0년대 초반부터 조시 깁슨이나 사첼 페이지 등을 영입하기 위해서 추파를 던졌지만, 시대의 변화 - 실제로는 시장의 변화에 둔감한 랜디스 커미셔너나 다른 구단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재키 로빈슨을 시작으로 해서 흑인선수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리키나 벅 등이 인종 차별이라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린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아닌 자본에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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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로 내셔널리그의 성장과 함께 1937년에는 중서부지역의 팀을 중심으로 니그로 아메리칸리그(NAL)가 결성되어서 다시 한번 니그로리그도 양대리그로 재편되었다. 1920년대의 양대리그가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인해 자멸한 역사가 있었기에, 이번에는 상호 공존을 모색하였다. 여러가지 협의 끝에 니그로 내셔널리그가 동부지역을, 니그로 아메리칸리그가 중서부를 관리하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고, 1942년에는 15년만에 니그로 월드시리즈가 재개되었다.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의 사첼 페이지와 홈스테이드 그레이스의 조시 깁슨이라는 투타의 슈퍼스타의 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1942년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시작으로 매년 새로운 역사를 만들면서 니그로리그는 성장하였다. 그러나, 밀물이 있어면 썰물이 있듯이 니그로리그가 최고조로 성장하였을 때에 파국의 씨앗은 잉태되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메이저리그의 문호개방이 실제로 일어나서 재키 로빈슨이 브룩클린 다저스와 계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니그로리그의 몰락

지금까지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행은 흑인파워의 성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니그로리그의 슈퍼스타들이 아닌 재키 로빈슨이나 래리 도비 등과 같이 신인급 니그로리거가 메이저리그에 진입함으로서 역설적으로 니그로리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니그로리그의 미래인 신인급 니그로리거들이 앞다투어 메이저리그로 빠져나감으로서 니그로리그는 노장들의 잔치가 되었고, 미래 자체가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재키 로빈슨을 시작으로 로이 캄파넬라, 돈 뉴컴 등이 입단한 브룩클린 다저스가 1957년을 끝으로 LA로 이전하면서 니그로리그의 숨통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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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와 자이언츠가 서부지구로 이전하기 전까지 중서부지역은 사실상 메이저리그로부터 배제된 불모지였다. 중서부의 니그로리그구단들은 메이저리그와 치열한 경쟁을 펼칠 필요가 없었지만,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서부행으로 니그로 아메리칸리그가 시장을 독점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그것도 흑인선수들이 다수 포함된 다저스의 LA행은 사실상 결정타였다고 할 수 있었다. 니그로리그를 지탱하는 축인 흑인관중들도 메이저리그 - 특히, 다저스의 경기로 밀물듯이 몰려감으로서 니그로리그구단들의 재정은 악화일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1948년 니그로 내셔널리그가 그 막을 내리면서 니그로리그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니그로 아메리칸리그가 196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그것은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면서 생존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다저스와 자이언츠에 이어서 어슬레틱스가 니그로리그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캔자스시티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마지막 보루였던 니그로 아메리칸리그도 그 끝을 고했다. 몇 몇 니그로리그팀이 니그로 아메리칸리그가 사라진 후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갔지만, 그들이 행한 것은 야구라기 보다는 서커스에 가까운 순회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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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로리그는 메이저리그에 완전히 흡수통합되면서 그 역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1971년 사첼 페이지를 시작으로 매년 몇 명의 니그로리그출신들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있지만, 여전히 니그로리그는 미국의 야구역사에서 배제되고 있다.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의 재키 로빈슨보다도 브룩클린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이 더 친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듯이 니그로리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려한 문명을 자랑했던 마야와 잉카가 침략자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어서 그 진실을 알 수 없듯이 니그로리그와 선수들은 증발이라도 한듯이 역사밖으로 추방되었다.

역설적으로 재키 로빈슨을 시작으로 야구에서 인종차별의 벽은 사라졌다는 이름 아래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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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손윤